톱가수에서 신용불량자, 그리고 벤츠 판매왕으로 변신한 김민우 교수님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커뮤니티

실전 같은 실습과 이론 교육의 병행으로 졸업 전 이미 프로 딜러!

자유게시판

톱가수에서 신용불량자, 그리고 벤츠 판매왕으로 변신한 김민우 교수님

본문

[2009.06.30 16:24]         
 


 

[쿠키 문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속될 것 같던 인기가 떨어지고 이름이 잊혀지면서 삶이 중심을 잃고 송두리째 흔들렸죠.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긴 방황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제 인생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때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였다가 지금은 6년차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는 김민우(40)씨는 30일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현재 수입자동차 판매회사인 한성자동차에서 강남전시장 영업1팀 차장을 맡고 있다. ‘판매왕’에 여러 차례 등극했을 정도로 발군의 세일즈맨으로 활약하면서 억대의 연봉을 받고 있다. 그러나 ‘톱스타 가수’에서 ‘벤츠 판매왕’으로 변신하기까지는 수많은 역경과 굴곡이 있었다.

김씨는 1990년 데뷔하자마자 ‘사랑일 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휴식 같은 친구’ 등 1집 수록곡들을 잇달아 크게 히트시키며 가요계를 석권했다. 당시 TV 가요순위 프로그램이었던 ‘가요 Top10’에서 연속 10주간 1위를 차지했고, 연말 양대 방송사에서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음반을 100만장이나 팔아치웠다.

하지만 그는 ‘입영열차 안에서’로 절정의 인기를 누릴 무렵, “실제로 군 입대를 해 인기를 극대화시키자”는 소속사의 뜻에 따라 갑작스럽게 군에 입대한 뒤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입대 전날까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막상 제대하자 그는 이미 ‘잊혀진 가수’ 였고, 가요계 판도는 뒤바뀌어 있었다. 컴백 방송이 있던 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무대에 서서 노래를 시작하는데 환호는커녕 드문드문 예의상 던지는 박수가 이어질 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지만 썰렁한 분위기에 숨이 막혀 왔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 작고 초라해지는 자신을 애써 다독이며 무대를 내려오는 데, 등 뒤에서 엄청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태지와 아이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일찍 찾아온 성공이 얼마 못 가 보란 듯이 양날의 칼이 돼 돌아오더군요. 어딜 가나 나를 대접해주는 것이 좋았고, 갑자기 주어진 인기와 큰 액수의 돈이 마냥 신기해 미래의 계획과 비전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친 교만이었죠.”

김씨는 한동안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았다. 2집에 이어 3집, 4집이 잇따라 실패하자 좌절과 함께 모든 방송활동을 접었다. 그러나 워낙 형편이 안 좋은 집안 사정에 가장이기도 했던 그는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는 나서야 했다. 그는 “1집이 대박이 났다고는 하지만 신인으로 데뷔하면서 맺었던 계약관계상 제게 돌아오는 것은 많지 않게 돼 있었습니다. 결국 일명 ‘밤무대’라고 불리는 야간 업소와 행사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미사리 카페촌에 있던 한 카페에서 매일 저녁 9시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손님들에게는 배경음악에 불과했다. 심지어 술에 취해 무대 앞으로 뛰어나와 김씨 노래에 맞춰 비틀거리며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쉴 수 없었던 그는 서울 강남 일대에서 송탄, 의정부, 인천, 그리고 지방 소도시까지 전국을 오가며 낮밤이 바뀐 유랑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래도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씨는 고생 끝에 ‘김민우와 쉐이크’라는 그룹을 만들어 공연을 시작했다.

이때는 그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였다. 푼돈을 모아 새로운 악기를 하나씩 장만하고 녹음을 할 수 있는 작업실까지 꾸미면서 가진 돈을 모두 쏟아붓고도 상당한 액수의 빚을 져야했다.

실낱같은 희망은 얼마 못 가 절망으로 바뀌었다. 어느 날 그의 작업실은 평소 정신병을 앓던 이웃주민이 그 건물에서 프로판 가스를 터뜨리는 바람에 화재로 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건 아무리 업소를 돌아다녀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엄청난 빚과, 27세의 나이에 붙은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뿐이었다. 마음속에서 애써 붙잡고 있던 삶에 대한 의욕이 허무하게 툭 끊어져 버린 뒤 밤무대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깊어져 갈 무렵 우연히 수입차 딜러로 일하는 후배를 만나게 됐고, 수입차 판매사 로얄 오토모빌의 매장에서 김태성 사장이라는 인물을 만났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김 사장의 열정에 끌린 그는 “사장님, 저는 백지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해 여러 테스트 끝에 입사하게 됐다. 그에게는 총 10개 항목의 근로수칙이 적힌 계약서가 건네졌다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깍듯하게 대한다’, ‘지각이나 거짓말, 나태함 등 연예인으로서의 흔적이 보일 때에는 자진해서 퇴사하고 모든 계약을 무효화한다’ 등.

마침내 김씨는 2003년 가을, 34세라는 늦은 나이에 새 직장을 갖고 자동차 세일즈맨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아침 6시에 출근해 가장 먼저 차를 닦고, 선배 영업사원들이 출근할 때 허리를 90도 굽혀 인사하면서 자동차 메커니즘과 시승 교육 등을 받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상사들에게도 ‘형’이라고 불렀다.

세일즈 초기에는 대기업의 ‘호프 데이’ 같은 행사에 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한바탕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면 그 자체도 기쁨이었지만 적지 않은 계약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얼마 자지도 못하고 곧바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져 양복 차림에 넥타이만 풀고 침대에 앉은 채 ‘ㄴ’자로 자던 날도 수두룩했다.

“연예인 하다가 다 늦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하려니 이중으로 힘들었죠. 그래도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 저 보다 선배이면 모두 형이라고 호칭했습니다. 저는 저 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더라도 아주 친해지기 전에는 형이라고 부릅니다.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데요, 그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더 편합니다.”

갖은 노력 끝에 김씨는 로얄 오토모빌에서 입사 1년 만에 ‘판매왕’에 오르며 최단 기간에 우수사원으로 발돋움했다. 1년 뒤에는 100% 성과급제로 운영되는 한성자동차로 이직해 다시 판매왕에 올랐다. 한 달에 2대만 팔아도 성공적이라는 업계에서 무려 8대를 판매한 것이다. 그의 최고 기록은 2007년 5월 9대, 한해 통틀어 68대를 판매한 것이다. 김씨는 “저는 벤츠 딜러 중에서도 빅 딜러에 속합니다”라고 자부하며 “1년에 50대 이상을 팔고 판매 상위 10%내를 항상 유지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일즈맨 외에 명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대경대학교 자동차딜러학과 전임교수로 매주 강의를 나가고 있으며, 일반 기업체 직원들을 대상으로도 매달 많게는 10회, 적게는 3∼5회의 강연을 벌인다. ‘영업’ ‘변화’ ‘도전’ 등의 주제로 설득력 있는 강연을 펼쳐 업계에서 손꼽는 섭외 대상이다. 올 1월에 결혼을 해 이제 3주 된 딸아이를 두고 있다. 김씨는 그간의 살아온 얘기를 담아 최근 ‘나는 희망을 세일즈한다’(청림출판)라는 책을 출간했다. 섣불리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낸 것은 아니다.

“무대를 잃은 좌절감과 수억 원의 빚으로 지옥같이 힘든 날들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죠.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심정으로 세일즈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연예인이 그런 일을 몇 달이나 하겠느냐’며 반신반의했고, 저 역시 자존심을 내려놓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워낙 내성적이고 낯선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했고, 결국 새로운 기쁨과 보람을 찾게 됐습니다. 누군가가 제 인생을 통해 아무리 밑바닥이라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미약하지만 제 인생의 궤적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습니다. 특히 연예인 후배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자꾸 벌어지는데, 한순간의 인기가 삶의 전부가 아니다, 나 같은 사람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는 말을 선배로서 해주고 싶었습니다.”

김씨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진솔하다. 정말 본인이 직접 쓴 게 맞느냐는 기자 질문에 김씨는 “그럼요.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1년 동안 애 많이 먹었습니다”라고 웃으며 답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